지난전시

이종한 안명혜 展

2015. 05. 30 ~ 07. 02

이종한

“꿈의 집 짓기”

시간이 지나면서 생활이 부여한 단역, 조연, 주연이라는 역할들을 하면서 내가 경험한 것들이 사진 한 장으로 간직되겠거니 했다. 그러나 여전히 머릿속에서 ‘기억’은 사진이 아니라 영화처럼 돌아간다. 그리고 이 영화가 나도 모르게 상영돼서 놀라기도 하지만 나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이 영화 덕택에 끝없이 바쁘게 편집되는 어제와 오늘을 가지고 있다.

놀이에 열중한 아이에게 색은 멈춘다.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집은 파랑과 보라가 뒤섞였으며, 바다는 초록과 노랑으로, 자동차는 빨강과 주황이었다. 어머니의 매서운 눈초리를 피해 나를 불러내던 단짝 친구의 발랄한 웃음은 노랑과 분홍이며, 선생님의 꾸중과 시험지는 빨강과 검정의 덩어리였다. 그 시간들은 매끄러운 광택처럼 미끄러졌지만, 나의 ‘공간’은 손에 묻은 크레용 얼룩과, 이것과 저것을 이어붙이는 흰 무더기의 밀가루 풀에 있다. 친구가 보이지 않는 선을 따라 접어가며 만들었던 종이배는 멋있었지만 왠지 고독해 보여서 혼자타기에 좋을 것 같았다. 오히려 운동장 흙바닥에 물주전자로 만들었던 도형들처럼, 한지에 닿아 번져나가는 색 덩어리들과 손에 뭉치는 엉김이 끈끈한 인간사 같아서 종이죽을 만든다.

잘 짜여 진 안무처럼 기억이 흘러간다. 울퉁불퉁한 감정이 돌아가면 한지를 산다. 그림자 놀이를 해도 그만이고, 붓으로 그려도 좋고, 질기고 부드럽고 오래간다. 아마 내 머릿속의 영화의 필름은 한지로 만들어진 것 같다. 집모양의 판을 떠서 한지 죽을 넣고 조그만 집들을 떠내면서 기억한 장소들을 떠올리며 새로운 집을 짓는다. 아톰처럼, 마린보이처럼, 변신로봇처럼 엔돌핀 가득한 꿈을 가지고 있고, 집들을 세운다. 열두 채를 세워도 힘이 안든다.

집안에 사람을 넣는다. 너를, 그를, 그녀를 닮은 집을 세우며, 내 작품의 마을을 스스로 돈다. 한때 나는 들어갈 수 없었으나, 너가 있는 집을, 이제 내가 웃으며 맞이하며, 한지처럼 살포시, 종이죽처럼 끈끈하게 색덩어리 속에 하나가 되는 걸 꿈군다.

- 작가노트 중에서

안명혜

“ 그길의 입구에 서다”

‘ ...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에 미련과 아쉬움을 담았다. 하지만 나의 ‘그 길의 입구’ 시리즈에는 선택한 길에서 자기 몫의 행복을 꾸려가는 명랑함이 담겨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어느 길이든 길의 입구에 서게 된다. 나는 미련이나 후회보다는 입구로 들어선 그 길에서 이왕이면 즐겁게 살아보자고 다정하게 말한다. 화사하고 밝은 나의 그림이 그래서 길 위에서 서성대고 휘청이는 우리를 위로한다.

그길의 입구는 색병치 혼합의 점작업을 통해 형상들, 경쾌한 선들, 밝은 색상들, 꽃모양의 문양들, 내 던져진 물감덩이들, 세이프 캔버스의 형태들은 어느 때고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나의 일상에서 보여 주고 있는 그릇, 컵, 꽃병, 새, 물고기, 꽃 등의 소소한 일상을 담아 부드러움을 보여 주고자 한다.

특히 세이프 캔버스는 나에게는 놀이의 장이며 삶을 일궈나가는 가장 큰 의미로 갇혀진 사각의 틀의 캔버스를 부수고 나갔다. 즉, 회화 고유의 고상함이나 가치와 그 깊이를 차라리 해묶은 가치로 거부하고 있으며 또 다른 새로운 놀이의 장을 통해 조형성을 부여 하고있다.

- 작가노트 중에서